티스토리 툴바

BLOG main image
글 타래 (16)
상상 (9)
짜릿 (2)
진지 (3)
명랑 (2)
100人 (0)
p (0)
344 Visitors up to today!
Today 2 hit, Yesterday 0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12/02/03 11:05

 날씨가 추웠던 어느 날, 나는 감기에 걸렸다. 언제나 그렇듯, 감기는 재채기 그리고 콧물과 함께 찾아왔다. 그 꼴을 보던 주위 사람들, 한마디 건넨다. “약 좀 먹지?”, “약 먹어야 감기 빨리 낫는다.” 어렸을 적에는 그 말을 참 잘도 들었다. 쓰디쓴 가루약을 삼키거나, 물을 잔뜩 들이켜 알약을 넘기거나, 때로는 달달한 시럽을 마시곤 했다. 고작, 감기 하나에. 그러나 이제는 머리가 너무 커져 버려서인지, 나는 약을 먹지 않고 다큐멘터리를 보기로 결정했다. 언젠가,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한 감기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제법 좋았더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큐의 내용은 이렇다. 한국은 감기 하나에 약을 먹는 나라다. 그런데 그런 나라는 외국에는 없다. 미국과 유럽의 어떤 병원에서라도 초기 감기 환자에게 약을 건네는 곳은 없다. 한국은 이상하게도 감기에 효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으로 위험한 약을 쉬이 건넨다. 심지어 항생제도 필수적으로 감기약 속에 집어넣는데, 이는 몸에 이로운 세균까지 없앨뿐더러, 세균이 항생제에 내성이 생기게 하는 무척 위험한 행위다.
 

 처음 들으면 충격적일 내용이지만, 언젠가 예전에 이미 들어봤던 이야기이기에 크게 놀랍진 않았다. (가짜 환자에게 꾸역꾸역 약을 먹이려는 한국 의사들의 태도에는 좀 어이가 없긴 했다.) 정작, 내가 다큐에서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핀란드의 어느 초등학교 교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묻는다. “감기에 걸렸을 때, 학교를 쉬어 본 적이 있는 사람?” 한 명, 두 명, 세 명, … 교실에서 절반의 학생이 손을 든다. 그러니까, 핀란드에서는 아이가 감기에 걸렸을 때,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는 게 아니라, 학교를 쉬고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게 한다는 것이다. 기억을 헤집어보았다. 과연, 나는 감기 때문에 학교를 쉬어 본 적이 있었던가? 음…. 없었다. 나는 한 번도 감기 때문에 학교를 쉬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고작, 감기’ 때문에 학교를 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감기는 ‘고작, 감기’일 뿐이니까. 그런데 괴이하게도 한국인은 ‘고작. 감기’ 하나에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항생제까지 삼킨다. 아니, ‘고작, 감기’라면서 왜 감기에 그토록 많은 약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것일까?
 

 한국에서 태어나 감기에 걸린다는 것의 의미는 이렇다. 각종 TV광고에서 선전하는, 감기 그 자체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약을 구매하면서, 탁월한 의사의 배려를 통해 항생제도 집어삼키고, 약으로는 아쉬우니 주사 한 대 맞아주며, 이 모든 것은 ‘고작, 감기’일 뿐이니까, 쉬는 일 따위는 없이 학생은 학교로 직장인 직장으로 나와야 하는 것.

 아, 그래서 ‘감기는 만병의 근원’으로 탄생했던 것이 아닐까. 감기를 고칠 ‘휴식’은 취하지 않고, 실질적 효과는 없고 부작용만 그득한 약을 삼키며, 골골 되면서 끊임없이 일을 하니, 감기 한 번 걸리면, 여러 가지 병을 불렀던 것이다.
 

 슬펐다. 고작, 감기 하나에 쉬지도 않고 약을 먹어가며 ‘노동’을 하게 되는 곳이 한국이라는 생각을 하니 말이다. 나 또한 그랬다. 감기에는 푹 쉬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알바 사장님에게 차마, ‘감기 때문에 며칠간 쉬겠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작, 감기에 ‘노동’을 멈출 수 없는 대단한 근면 문화를 가진 한국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약을 먹을 수도 없는 일이라, 골골 되면서 알바를 하러 나섰다. 2주 즈음 지났을까, 약을 조금도 먹지 않았음에도 감기가 거의 나았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누군가는 감기에 걸려 골골거린 채로, 노동을 하러 학교나 직장에 나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TV에서는 한국이 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는 뉴스를 알리고 있었다. 

2012/01/23 16:10

 21세기 한국, 이곳은 꿈동산이다. 꿈동산을 움직이는 건, 당연히 ‘꿈’이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너도 나도 그들도 우리도 모두다, ‘꿈’의 위대함을 설파한다. 먼 옛날, 제법 유명했던 누군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자본’이라고 말했었다. 자본이라니, 세상에. 그 사람은 분명히 낭만은 요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진보했고,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던 21세기도 도래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쿨하게 변했다! ‘꿈의 운동’으로 움직이는 꿈동산이 된 것이다. 꿈동산에는 단,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꿈을 파는 사람이요, 둘은 꿈을 사는 사람이다. 사고팔고, 사고팔고, 사고팔고, 계속, 계속, 반복, 반복……. 이들이 있기에 꿈은 이 세상 곳곳에서 발견된다!


 꿈을 파는 사람, 그들만큼 위대한 기업가는 없다. 그들은, 선지자다. 꿈이야말로, 끝내주는 ‘효용’임을 깨달은 선지자. 최고로 부유한 경제학은 말한다. “상품의 가치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오직, 효용뿐이다!” 시장은 위대하니, 가치는 그대로 가격이 된다. 그러니까, 장사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가격을 올려서 팔고 싶다면, 이윤을 최대치로 내고 싶다면, 가치를, 그러니까 ‘효용’을 올리면 될 일이다. 어떻게? 꿈을 집어넣으며, 구겨 넣으며, 뿌려주며, 데코해주며, 마케팅을 하면서. 꼭 꿈이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바나나가 들어가지 않아도 바나나맛 우유는 잘 팔리듯, 꿈이 아닐지라도 ‘꿈같은 맛’이면 충분하다.


 가치는 노동투입이 아니라, 효용으로 결정이 나듯, 상품의 종류나 형태보다는 ‘꿈’의 환상이 느껴지느냐 않느냐가 시장에선 중요하다. 날이 갈수록 책 사는 사람이 줄어드는 출판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가는 책들을 보라! 그 책들이 파는 건, 글이 아니다. 꿈이다! 일만 오천 원이 비싸서 책을 못 사겠다는 사람도, 꿈을 첨가된 책은 이만 원에도 산다. 꿈의 효용은 고작 일만 오천 원에 비할 데가 아니다.


 꿈이 첨가된 상품이라면 기꺼이 돈을 ‘투입’하는 자, 그게 꿈을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호모이코노미쿠스라 생각한다. 즉, 언제나 상품을 구매할 때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최고인 제품만을 선택하는 소비자라는 뜻이다. 이들이야말로 궁극의 합리적인 소비를 지향한다. 꿈이라는 효용은 그깟, 현금 숫자 쪼가리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소설에서도 목청 놓아 부르짖는다. 원래, 예술계는 그렇다고? 무슨 소리! 젊은이에게 꿈을 꾸라고 권유하는 대기업 광고를 본 적이 없는가? “(꿈을 죽어라 꾸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라고 달콤하게 애무하지 않던가? 어디서도 그 누구도 감히, 꿈의 가치를 깎는 자 없으니, 날이 갈수록 꿈의 효용은 끝없이 높아져만 갔다. 꿈이야말로 값이 떨어질 일 없는 부동산이요, 우량주식이요, 금이다. 이러니, 똑똑한 소비자라면, 지금 당장, 꿈을 사야 하지 않겠는가? 한시라도, 빨리, 지금이라도, 당장, 구매하는 자만이 꿈의 시장에서 이기는 법이다.


 합리적인 소비, 스마트한 소비로 꿈을 잔뜩 사들여서, 마침내 시장의 게임에서 승자가 된 소비자는 무엇이 되는가? 앞에서 난 꿈동산에서는 단,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다고 했다. 꿈을 샀던 소비자는, 이제 꿈을 파는 기업가가 된다. 꿈을 파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꿈을 사는 사람들의 궁극의 목표다. 꿈을 파는 기업가는 말한다.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꿈의 주식을, 부동산을, 금을 구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되고 싶다면, 꿈을 사세요! 그의 이야기를 듣던 스마트 소비자는 탄복한다. 그리하여, 꿈의 주식은 오늘도 상승세를 찍는다.


 아, 물론, 모두가 꿈을 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꿈을 팔 수 없는 사람의 개인 문제일 뿐이다. 꿈을 충분히 사지 않았던가, 꿈을 믿지 않았던가, 온종일 웃지 않았던가, 스마트한 소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고작 개인의 문제이지만, 여기는 꿈동산이므로 쉽게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꿈을 팔 수 없는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따뜻한 한마디를 건넨다. “당신(의 꿈의 소비)을 응원합니다.^^”

2012/01/16 22:59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괴물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좌빨이고, 둘은 수꼴이다. 이들 괴물들은 서로 상대를 쳐다보며 들끓는 증오를 숨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것은 저 괴물 탓이었기 때문이다. ‘저놈들만 사라지면 이 세상은 틀림없이 좋아진다!’라고 좌빨과 수꼴은 ‘똑같이’ 믿었다. 언어는 같았지만, 대화는 없었다. ‘아니, 저놈들하고, 대화라는 걸,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더냐!’ 신이 있다면, 자비가 있다면, 정의가 있다면, 저 썩을 놈의 종족은 멸종할 터였다. (그런데 신은 구경만 하고 있고, 자비는 구걸해야 했고, 정의는 무엇인지 물어봐야 했다.)
 

 그러던 차에, 한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이라는 제목을 붙이고서. 대통령! 이 단어만 들어도, 왠지 모르게, 쥐가 떠오르고, BBK 치킨이 먹고 싶고, 꼼수를 부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아아, 그러나,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거시기’가 아니다. ‘그 자식’은 2007년 대선이 아니라, 1997년 대선 때 당선이 된 대통령을 가리킨다. 다큐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카메라가 들여다보는 한 남자는 1997년 대선 날을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로 부른다. 그렇다! 이 다큐는, 괴물다큐, 수꼴극장이다.
 

 다큐를 보기 전,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좌빨이었고, 좌빨로서 상종이 금지된 수꼴에 대한 영상을 본다는 것이,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방문을 잠그고 남몰래 불온영상을 보는 기분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수꼴에 대해 들었던 거라곤, 어처구니없고, 이해할 수 없고, 공감되지 않는, 망언과 행동들뿐이었다. 나는 두근두근 거렸다. 요번에는 또 어떤 큰 웃음을 던져 주실 것인가? 아니면, 분노를 느끼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코미디나 스릴러. 어느 쪽도 나쁠 것 없었다.
 

 카메라가 들여다 본 것은, 말과 행동이 아니라, 삶이었다. 카메라는 한 남자의 말을 넘어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그시 응시한다. 그러니까, 그는, 시골에서 도시로 떠밀려온 ‘농부’였고, 도시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도시인’이였으며, 아직 대기업 마트가 도래하지 않은 재래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식당 ‘자영업자’면서,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을 대학교에 보낸 ‘부모’였다. 또한 자영업자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정책을 시행하는 정당의 지지자이면서도, 정작 본인도 언제라도 그 막다른 골목에 내몰릴 수 있는 ‘서민’이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말과 행동은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삶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내게는 익숙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내 부모의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은 빨갱이의 고향이라 부르는 어느 광역시에서 가정을 꾸렸다. 도시가 고향은 아니었고,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경우였다. 아버지는 농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식당 자영업자의 딸이었다. 흔히 도시로 올라온 갓 결혼한 시골 부부가 그렇듯, 그들은 가난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현 집권여당으로부터 우편물이 온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는, ‘그 자식이 대통령이 되어있는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정치보단 신앙에 관심이 많았다.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가 미국에서 대통령이 된 날, 어머니는 그가 ‘기독교인’이니 우리나라에게도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정치와 어머니의 신앙으로도 가족의 가난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그러니까, ‘그 자식이 대통령’이 된 것이 문제이거나, ‘신앙심이 부족해서’ 나타난 문제일터였다. 어쨌든 ‘남 탓 하지 말고, 남의 것 빼앗을 생각 말고,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의 정답이라고 믿었던 부모님이었다. 가난에 찌들면서도 어떻게든 열심히, 성실하게, 착하게 살아왔던 부모님의 삶, 그 삶은 다큐가 응시한 삶, 그 자체였다.
 

 다큐가 끝나갈 즈음, 다큐의 주인공인 남자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서 말한다. 그 순간, 나는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와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었던 이가 꿈꾸던 세상은 내가 꿈꾸던 세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도, 어쩌면 내 부모도 나와 같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때의 그의 표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괴물로 부르거나, 적이라고 부르거나, 나쁜 놈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말하자면, 그건, ‘순박한 사람이 짓는 착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은, ‘그들’이 끔찍하게 악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무리 봐도, 수꼴극장에 나오는 그는, 적당히 착하고,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부모님이었다. 수꼴 괴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괴물이라고 서로를 부르던 이들은, 결국은 같은 삶은 사는 존재들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괴물에게는(좌빨이든, 수꼴이든) 한 종류의 삶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가난한 서민’의 삶이었다. 어느 한 쪽이 멸종해도, 가난한 삶은 여전히 이어질 것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가난한 건 마찬가지니까. 첫 문장을 다시 써야겠다. 세상에는 괴물로 살아가는 사람과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괴물들이 서로를 증오할 때, 인간은 괴물들 위에서 군림한다. 괴물들이 서로를 죽여도, 괴물의 삶은, 눈곱만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괴물의 삶이 팍팍한 이유는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괴물의 탓이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탓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묻는다. 그렇다면 괴물 위에 군림하는 인간은 누구인가? 구분법이 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괴물과 다른 삶을 사는 자. 그가, 인간이다.    

prev"" #1 #2 #3 #4 #5 ... #6 next